동백 / 안량제
여름 휴가철이었다. 부부동반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을 나섰다. 오래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한적한 섬마을 보길도로 가는 길이었다. 말로만 듣던 보길도를 찾아가는 설레는 기분은 삼복더위도 시원한 가을바람같이 가슴에 스미고, 마음은 앞서 파도를 타고 바다 위를 나른다.
국토의 끝자락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가니 선착장에 닿았다. 생소한 여행지에 예약도 없는 터라 묵을 곳을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낯선 길을 가면서 보는 사람마다 숙박할 곳을 알아보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휴가철 여행지에 어두웠던 탓이었다.
마을 슈퍼를 찾아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숙박할 곳을 물었다. 주인이 일러주기를 저쪽 마을 이장을 찾아가 알아보면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분이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더니 친절히 안내해 주어 어렵사리 민박을 구하고 짐을 내렸다. 섬의 끝자락 아늑한 갯마을이었다. 바다도 가깝고, 앞이 탁 트인 집이라 일행 모두가 흡족해했다.
낮 시간이 긴 때라 해가 한 뼘은 남아 있었다. 먼 길 달려와 피곤은 했지만 남은 시간이 아까워 바닷가 산책을 나섰다. 민박집 주인이 일러준 대로 해변은 모래가 아닌 굵직한 몽돌로 가득했다. 억만 년을 부딪쳐서 깎이고, 씻기고, 닳아서 둥글둥글 몽돌이 됐나? 돌과 돌 사이로 찰싹대는 물소리가 바다의 숨소리인 양 살아있는 바다로 들려왔다.
도심의 오염에 찌든 응어리들을 소금으로 소독된 저 바닷물이, 싸악 씻어가는 듯 가슴속까지 시원했다. 삶에 지쳐 허둥대대다 받히고 찍힌 상처들도, 닳고 씻겨서 속살만 남은 몽들처럼 야무진 삶의 결실 있기를 기원하며 몽돌처럼 단단하기를 다짐했다.
맞잡은 아내의 손, 포근한 온기가 맘속까지 스며들어 비릿한 바닷물 냄새조차 향기로웠다. 멀리 바다의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어느새 해는 숨어버렸고, 까만 하늘의 햇빛이 검은 바다로 쏟아져 내릴 무렵, 낯선 등지를 찾아들었다.
섬마을에 밤이 걷히고, 곤한 잠에서 깨어나자 서늘한 바닷바람이 낯선 길손을 부추켰다. 보길도의 진주라고 자랑하는 뾰족산이 바로 눈앞이었다. 산자락 해안이 온통 동백숲이란다. 정상에 오르면 이 섬 모두와 가까운 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다는 민박집 주인의 설명이었다.
갯가를 따라 작은 포구를 지나고 숲길로 들어서니 동백 천지였다. 숲이 울타리를 쳐서 바다를 가리고 시야를 막았다. 그래도 귀와 코까지 막지는 못했다. 코를 거슬리는 비릿한 바다냄새와 귀를 간질이는 파도 소리에 섬의 정취를 흠뻑 느꼈다. 꽃이 필 철이 아니라 눈과 마음이 함께 즐겁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다. 빨간 꽃들이 숲을 물들였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동백꽃을 볼 수 없는 아쉬움 중에도 소중한 것을 얻었다. 마치 콩나물 같은 동백 싹을 찾은 것이다. 어린 싹이라 식별하기 어려워 혹시나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줄기 밑에 밤알 같은 동백 씨주머니를 달고 실 같은 뿌리를 흙 속에 박고 있었다. 본능인 듯, 호기심과 욕심이 발동했다. 이제 막 햇빛을 보려는 새싹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못된 욕망이 요동을 쳤다. 맨손으로 흙과 뿌리를 함께 파서 움켜잡았다. 함께 걷다가 지켜본 아내가 시비를 걸었다.
“이제 막 세상 빛을 보려는 새싹을 그러면 안 되지요!”
“아니, 지금부터 내가 입양하는 거야!”
몇 포기를 더 파서 움켜쥐고 도움을 청했다. 아내는 도리어 주민에게 고변을 해서 벌하도록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말에 안 되겠다 싶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곱게 쌌다. 일행들도 쓸데없는 장난이라며 핀잔했다. 동백은 해풍을 맞아야 생장하고 꽃도 피우지, 내륙에서는 성장이 어렵다고 헛수고 말라고 했다.
동백 싹은 신문지에 옮겨 배낭 속으로 숨겨졌다. 숨쉬기도 힘들었겠지만 저항도 못하고 강제로 태생지를 떠나, 인간 욕망의 포로가 되어 갇혀 버렸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숨어서 배를 타고, 뭍으로 와서 차에서 하루를 지내고, 내 집에 와서 새 삶의 자리로 화분에 뿌리를 묻었다.
풍토와 환경이 전혀 다른 아파트 베란다의 좁은 공간이었다. 극히 이기적인 심산으로 한 개의 화분에 다섯 포기를 옹기종기 심었다. 아침저녁 물을 주고 쓰다듬어 주며 마음을 썼다. 동백도 마음을 다졌는지 생기를 찾아 잎사귀가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 앳된 새순을 틔우면서 잘 자라주었다 작은 몸집이지만 가지도 생겨서 이웃하고, 서로 기대고 잎을 비비며 새들도 찾아들 듯한 작은 동백숲이 되었다.
푸른 생기가 활기를 더했다. 청정한 잎사귀들이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 속에 새 생동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시들시들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내가 가고 경황없이 헤매느라 미처 돌보지 못한 탓이었을까? 아니 처음부터 동백편이 되어 마음 써준 아내를 따라 갔을까? 아니면 아내가 혼자 외로워 동무하자고 데리고 갔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애초 동백은 내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두들 아내 곁으로 보내서 연원토록 동무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주를 시켰다.
양지바른 아내의 유택 정원에 세 번째 이식된 동백이 뿌리를 박았다. 콘크리트 벽 속, 새 뼘도 안 되는 화분에서 물 한 모금도 사람 손을 쳐다봐야 했다. 이제는 하늘 비 맞고, 깊은 땅심 덕분인지 동백은 몇 년 새 훌쩍 컸다. 누구라도 탐낼 만큼 예쁜 꽃도 피고 지고. 동백의 자태가 완연하다. 멀고 먼 남쪽 섬에서 데려온 동백이다 비록 낯선 땅이요, 환경일지라도 이제 서로가 외로움 달래며 아내와 영원한 친구 되어 서로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 2교시 / 이종화 (0) | 2016.07.15 |
---|---|
[좋은수필]흑백사진 / 이지원 (0) | 2016.07.14 |
[좋은수필]그 말씀대로 / 유혜자 (0) | 2016.07.12 |
[좋은수필]돼지 뒷다리 / 간복균 (0) | 2016.07.11 |
[좋은수필]노란 참외 / 박성숙 (0) | 2016.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