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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못 뽑기 / 정경아

못 뽑기 / 정경아


 

 

섬뜩하다. 예리한 무엇에 찔린 듯 온몸의 촉수가 살아난다. 아궁이의 재를 퍼내다 말고 나도 모르게 멈칫, 손을 멈추었다. 웬 못이 이리도 많은가. 시뻘겋게 녹이 난 것, 구부러진 것, 두 동강이 난 것, 대가리가 떨어져나간 것 등이 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아궁이의 재를 퍼다 부추 밭에 뿌려 주려 했는데 이대로는 거름으로 쓸 수도 없겠다. 생각해 보니 집을 짓고 남은 폐목으로 군불을 지핀 결과이다. 못을 뽑아내는 것이 귀찮고 성가셔서 그냥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무는 타서 못이 박혔던 흔적조차 없이 재가 되었는데 타지도 못한 못만 뎅그러니 제 속에 남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못을 가려내지 않고는 재를 함부로 퍼다 버릴 수도 없겠다. 밭에 뿌릴 수는 더욱 없다. 지난여름 맨발로 텃밭에서 일을 하다 못에 찔려 고생했던 기억이 나면서 도저히 그냥 버릴 수가 없다. 언덕바지에 그냥 버리지도 못하겠다. 행여 언덕을 기어 사는 호박넝쿨에라도 박힐까 염려된다. 이미 무디어진, 못쓰게 못이지만 함부로 버리거나 방치했다간 또 다른 화근이 될 것 같다. 나무를 용도에 맞게 쓰기 위해서 못을 박았을 테다. 용도 폐기된 나무는 땔감으로 재사용되어 아궁이에 던져졌다. 불속에서 제 몸을 다 태워 못이 박혔던 흔적조차 없이 한 줌 재로 부재를 대신하는데 어찌 못만 이렇듯 흉한 모습으로 남겨졌는가. 나무가 탈 때 함께 타서 재가 되어 사라졌으면 좋았을 걸.

망설이다 못을 가려낸다. 모래놀이를 하듯 두 손으로 차근차근 재를 뒤진다. 손끝에 만져지는 부드러운 재의 감촉이 야릇하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놀라 멈칫한다. 휘어지고 끊어진 모습들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어떻게 그 뜨거운 불속에서 남았을까. 가려낸 못을 분리수거함에 담아놓고 손뼉을 쳐 장갑의 재를 털어낸다. 개운하다.

내친김에 장도리를 꺼내 들었다. 여기저기 못이 박힌 채 널브러져 있는 폐목들의 못을 뽑아내고 알맞은 크기로 잘라 정리해두어야겠다. 녹물이 흘러 그대로 멍이 되었는지 나무의 색은 검게 변해 있다. 폐목의 못을 뽑는다. 못은 나무에 박힌 채로 삭았거나 녹이 쓸어 꼼짝도 않는다. 구부러지고 부러진 게 더 많다. 못으로서의 역할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성한 척 있던 것도 장도리를 갖다 대면 맥없이 부러지고 만다. 찌익찍 소리를 내면서 떼를 쓴다. 어떤 건 나무의 살점이 같이 찢어진다. 공구다루기도 서툴다보니 못을 뽑아내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다. 참으로 힘든 싸움이다. 어림없는 일 같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단지 폐목에 박힌 채 못으로서의 일생을 마치는 못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 이상 멈출 수는 없다. 반대쪽을 망치로 살살 두드려본다. 못이기는 척 마지못해 빠져나오는 못이 반갑다. 끝이 보이는 것은 그래도 조금 수월하게 뽑혀 나온다. 너무 깊숙이 박혀 꼭지만 보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장도리에 물리지도 않을뿐더러 고집불통 옴짝달싹 않는다. 짐작으로 반대쪽을 두드려도 이미 나무에 박힌 채 녹슬고 무디어진 못은 움직임이 없다. 둘이 하나인양 도저히 틈이 없다. 누가 끼어들기라도 할까 오히려 경계라도 하는 듯 미동조차 없다. 어떻게 해야 뽑을 수 있나.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 착잡하기까지 하다.

주저앉아버렸다. 이미 쓰임을 다해 널브러진 폐목에 박혀있는 저 못들을 어이할까. 오래전에 녹이 쓸고 무디어지고 구부러진 채로 나무와 얽혀 서로에게 아픔인 줄도 모르는 듯 둘이 하나처럼 밀착되어 있다. 서로를 덧내면서 같이 삭아지고 있다. 저런 나무는 불땀도 없는데. 못을 뽑아내지 않고는 아궁이에 넣어버리기도 이제는 망설여지는 폐목들이다. 나무가 타고난 뒤 재 속에 남은 못은 오히려 더 섬뜩하지 않은가. 타버리지도 못하는 못. 제 스스로 사라지지도 못하는 못의 말로에 전율한다.

우리는 쉬운 대로 필요에 따라 못을 박는다. 쓰임에 없게 되었을 때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우선 필요하다 싶으면 크게 망설이지 않는다. 뽑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겠는데 가능하다면 어디에도 못을 박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 필요해서, 또는 쓰임에 있어 박은 못이라도 쓰임이 다하고 나면 꼭 뽑아서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 의해 박혀진 못 스스로 뽑아내지도 못하고 끌어안고 버티었을 그 삶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으리라. 얼마나 쓰리고 아렸을까. 끝내는 시뻘겋게 덧나고 자기의 삶에 따라 휘어지고 부러지는 못을, 그런 못을 안고 견디었을 나무의 쓰라린 세월을 누가 봐주기나 할까. 쓰임이 다해 못을 안은 채 구석에 방치된 폐목처럼. 어쩌면 이제는 아픈 줄도 모를 만큼 무디어졌을 못의 존재조차 잊고 살지는 않을까. 어느 날 느닷없이 가슴을 찌르며 몸속으로 들어온 못. 무방비상태에서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수용해야하는 아픔. 그 치명상을 못질을 하는 사람은 알 리가 없다. 시간이 흘러 그 못이 잘못 박은 것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나무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다. 뽑아주려는 노력보다 대개는 무심하고 만다. 아니 회피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것 일게다. 나무가 타서 없어져도 못은 남는 것을. 행여 내가 뽑아줘야 할 말 못이 누구의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 녹슬어 가고 있지나 않는지?

못을 뽑아내느라 힘들었지만 보기 좋다. 알맞은 크기로 잘라 잘 쌓아둔다. 같은 폐목이건만 땔감으로서도 한층 좋아 보인다. 부러지고 휘어진 못들을 주워 버린다.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아픔을 이겨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잘 정리된 폐목에 있다. 누구의 가슴에도 내가 박은 못이 없기를 바란다.

 

폐목에서 먼 훗날 노쇠한 한 사람의 생을 본다. 가슴을 쓸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