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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수탉과 개구리 / 이태선

수탉과 개구리 / 이태선

 

 

봄이 무르익었다. 들판은 온통 푸르러 눈이 시리고 바람은 간들거리며 같이 놀자고 꼬드긴다. 흥에 겨운 발걸음이 사뿐사뿐 투스텝을 밟으며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비닐하우스로 향한다. 비닐하우스는 농사도 짓지만 살림집이기도하다. 시골로 이사를 하고는 어릴 적 촌에서 살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나 들판을 쏘다니다 사귄 이웃이다.

그날도 운동 삼아 들판을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들어가기가 아쉬워 하우스에 들렸다. 입구에 들어서자 꼬꼬꼬 닭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철망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병아리 태를 벗은 중닭 몇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 나온 안주인의 말씀인즉, 유정란을 먹으려고 수탉 1마리와 암탉 9마리를 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암수의 비율이 맞지 않아도 너무 안 맞는 것이 아니냐고 이죽거렸더니 안주인은, 유정란을 먹기 위한 수단으로만 수놈을 키울 뿐 사료만 축내고 알도 낳지 못하는 수탉은 비율 맞춰 뭐하느냐며 웃는다.

아무리 오지랖 넓다지만 남의 집 가계부 계산기까지 대신 두드려 줄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갈 때마다 안주인은 닭들의 근황을 지신의 신세타령까지 버무려 맛깔스럽게 전한다. 수탉이 이제 꼴값을 하느라고 꺽꺽 서툰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는 둥, 수탉이 암탉의 등에 올라타려다가 미끄러져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는 둥, 알을 낳기 시작했다는 둥, 요즈음은 수탉이 암탉의 등에 올라타도 너무 탄다는 둥, 그리고는 저렇게 힘을 쓰다 수탉의 다리(?)가 성할까.”라고는 방금 나하고, 하우스를 비껴나간 남편의 뒤통수에다 게슴츠레하게 뜬 한쪽 눈을 찡끗 꼿는 그녀에게서는 채 마르지 않은 시큼한 밤꽃냄새가 끈적거렸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도 닭을 키웠다. 그 때는 육이오사변 후라 물자가 귀하여 먹을거리가 변변치 않았다. 한 동네에 하루 세끼를 다 먹는 집이 몇 없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다 보니 닭 모이인들 변변했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닭들이 다리를 비실비실 거리다 주저앉는 것이었다. 우리는 닭들이 병을 앓는 줄 알았다. 이것을 본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에게 급히 개구리를 잡아 오라고 들로 내몰았다. 들판에 나갔더니 또래의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고 있었다. 개구리를 푹 삶이 먹였더니 닭들이 이내 팔팔해졌다. 모르긴 해도 아마 개구리는 닭들의 보양식이었던 모양이다.

짬만 나면 하우스로 간다. 9마리의 암탉을 거느리는 수탉이 궁금해서이다. 놈은 이제 제법 수컷의 위용을 자랑한다. 겨우 자란 붉은 볏을 잔뜩 세우고는 목을 길게 뽑아 올리고 호기롭게 꼬끼오.” 소리치기도 하고, 이 닭 저 닭의 등을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그러니 아홉 마리 중에 우리가 새침데기라고 이름 지은 암탉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놈은 새침데기 앞에서 보란 듯이 붉은 볏을 꼿꼿이 세우고 날개를 쫙 펴 보이기도 하고, 날개를 편 채 새침데기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지만 새침데기는 철망 밖만 쳐다 볼 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어쩌다 수탉이 가까이 가면 볏을 콕 쪼아버린다. 수탉의 볏은 사랑의 열병으로 점점 새빨개졌다. 큐피드의 화살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긋나게 쏘아져, 흰 머리 펄펄 날리는 이순의 끝자락을 밟고는 꿈길이면 종종, 콩콩 뛰는 가슴 안고 미루나무 줄지어 선 방천 둑으로 가고 있는 나처럼 애간장을 태우게 하나보다. 오죽했으면,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고까지 했을까.

그 날도 하우스에 갔다.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던 안주인이 근심어린 얼굴로, 수탉이 풍을 맞았는지 한 쪽 다리를 비실비실 거리다 주저앉는 바람에 바깥양반이 안고 동물병원에 갔다는 것이다. 지금쯤 올 때가 됐다며 사람이나 짐승이나 수컷이란쯧쯧이라며 심란해 했다. 수탉의 상태가 걱정스럽긴 해도 까딱 잘못 있다가는 혹여, 입놀림이라도 방정맞게 놀려 불난 집에 풍구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급하게 일어서려는데, 병원에 갔던 바깥양반이 수탉을 안고 들어왔다. 의사선생님이 뭐라더냐고 다그치는 안주인의 물음에 바깥양반은 그저 두 손으로 마른세수만 거푸 해댔다. 애가 마른 안주인이 연달아 다그치자 바깥양반은 그제야 의사선생님도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아마 퇴행성골다공증인 것 같다더군. 그러면서 일단 수술을 해보아야 알겠다며, 수술비가 약 70여 만 원이 든다고 하기에 그냥 왔지.”라고는 입맛을 쩍쩍 다신다. 그러자 안주인은 남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토종닭이 비싸다고 해도 일반 오천 원이면 골라서 사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졸지에 9마리의 암탉을 거느리며 위풍당당하던 수탉의 운명이 벼랑 앞에 놓인 등불보다 더 위태롭게 되었다. 수탉은 이런 자기의 처지를 하는지 모르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눈만 깜박깜박 거리며 골골골 거리고 있었다.

맘이 짠했다. 어떻게 하지. 더군다나 수컷의 본능 운운하면서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렸으니. 사실 수탉도 수컷으로 내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태어나고 보니 수컷이 되어 있었을 뿐이고, 신체적 구조로 인하여 하루에도 수없이 암탉의 등을 오르내리며, 주어진 종족번식의 사명이 숙명이라 여겨 오직 신명을 다 바쳤을 뿐이거늘. 수탉의 오해도 풀어주고, 이제 막 생의 절정에 오른 한 수컷의 생명을 구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에 빠졌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 방도, 방도를 찾자. 방도가 정말 없다면 두 문을 깜박거리며 주저앉아 골골골 기리고 있는 저 수탉의 생명은, 어쩌면 오늘 하루해를 넘기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였다. 눈앞이 환해져 무릎을 탁 쳤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개구리를 잡아 오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던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에는 수수께끼 같은 개구리의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안주인에게 수탉의 다리를 고쳐 줄 테니 어물전에 가서 생선을 다듬고 버리는 머리나 뼈를 얻어다 며칠 푹 고아 먹여보세요.”라고 했더니 안주인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수탉을 반 번 쳐다보고는 집으로 와 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들판에 산책을 나가면 더러 하우스에 들린다. 그럴 때면 안주인은, 일부종사라고 있는 아홉 마리 암탉이 낳은 유정란을 건네기도 하고, 오이가 맏물이라며 주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의사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