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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안개 / 노옥심

안개 / 노옥심  

 

 

 

동생은 안개 속으로 떠났다.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물론 낯선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가던 동생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이 가고 난후 우리가 함께한 시간도 그렇게 끝이 났다.

안개 자욱한 아파트단지 사이로 멀리 산이 보인다. 이른 새벽 창문을 여니 안개가 고목처럼 서있는 산을 감싸 안고 있다. 그 사이로 산허리를 에돌아 기차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안개는 텅 빈 선로위에 자욱하게 내려앉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혹에 빠지는 것 같다. 가야할 길을 알 수 없듯이 지나온 길도 희미하게 묻히고 마는 것처럼 허방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다. 인간이 한평생을 사는 것도 안개 속을 거닐 듯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동생이 가버린 길도 안개 속처럼 흐릿하다.

손을 대면 솜털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안개 속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서서히 사라지는 안개를 보고 있으면 떠나던 동생의 뒷모습 같아 마음이 아프다. 새벽안개가 온 몸을 감쌀 때는 단지 물방울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가슴 아린 추억의 부산물이 된다. 멍하니 흘려보낸 시간들 속에서 툭하고 불거지는 설움, 그것은 아무리 감추려 했도 감춰지지 않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다. 지금도 동생에 대한 끝도 없는 기다림과 체념은 반복되고 있다.

뱀 허리 같은 논두렁 옆 수로에 야생 미나리가 자라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서로 많이 뜯으려고 욕심을 냈다. 그러다가 지치면 우리는 긴 수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여름이면 그곳에서 미역을 감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고기도 잡았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동생과 함께 숨은 장독대 위로 별들이 유난히 더 반짝거렸다.

어느 추운 겨울아침이었다. 동생은 낯선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수로 옆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디를 가는지는 몰랐다. 그저 새 옷을 입은 동생이 부럽기만 했다. 몇 번이나 돌아보던 동생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동생과 아주머니가 사라진 얼마 뒤 아버지께 물었을 때 아버지는 아주 멀리하며 말끝을 흐리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그 후 하늘에는 별 대신 눈물이 가득했다. 서로의 그림자 같았던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느껴지던 수로만큼 흘러가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평생 아버지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 수심은 세월이 흘러 돌아가실 때까지 걷히지 않았다. 너무나 가난한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세상이 온통 가난 속에서 허덕였다. 열 명이 넘는 가족에게 보릿고개는 넘기 힘든 높은 산이었다. 부모님의 결단을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부모님 원망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동생이 잘 지내기만 바랐다.

기차가 지나가자 안개가 흩어지며 희미한 길이 하나 보인다. 동생이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길이 저편에서 꿈틀거린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동생이 입었던 분홍색 코트는 아직도 생각난다. 자꾸만 뒤돌아보던 동생의 얼굴도 안개 저편에서 희미하게 다가온다. 동생은 안개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한편의 영상이다. 아픔의 편린들이다.

시간은 흐른다. 잡을 수도 없는 시간은 기억에 기억을 덧씌워 새로운 기억을 만들며 흘러간다. 그래서 잊혀진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 기억들 중 동생의 모습은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산허리처럼 선명하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이라고 했던가. 그 속에는 망각의 시간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망각의 시간은 동생을 생각할 때면 나를 비켜가는 것 같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동생은 나를 찾아온다. 애써 잊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안개 속으로 빠지듯이 동생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이 안개처럼 느껴진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흩어버린 안개의 파편들이 잊혀진 기억들처럼 사라져간다. 그 파편 중 하나가 잊을 수 없는 동생에 대한 기억으로 자리한다. 지난 시간 속에 묻힌 기억 중 어떤 것은 슬프게 어떤 것은 기쁘게 우리들 가슴속에 남는다. 안개는 나에게 슬픔으로 남아 멀리 떠난 동생을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면 동생과 함꼐 했던 지난시절 속으로 잠시 되돌아가 본다.

또 다른 기차가 지나간다. 그 곁에서 안개는 기차의 흔적을 지우듯 기억도 지우고 있다. 햇살이 안개를 걷으면 동생의 모습도 잠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자리한 동생은 안개 속에 멈춰버린 시간처럼 영원히 함께할 것을 안다. 세월이 흘러 유년의 기억이 희미해져도 동생에 대한 기억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