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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커피와 떡볶이 / 설성제

커피와 떡볶이 / 설성제


 

 

비 오는 날, 조용한 곳에 들어앉고 싶어 사람이 드문 커피숍을 찾았다. 테이블 한 곳에만 손님이 있을 뿐 참으로 조용하다. 음악도 없다. 간혹 손님이 들어서지만 테이크아웃이다. 이런 조용한 곳을 버려두고 더 좋은 장소라도 있는 모양이다. 커피콩 가는 소리만 드르륵거린다.

주인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 들고 다가온다. 이 집 이름이 새겨진 두툼하고 하얀 사기잔을 다소곳이 내려놓는다. 손바닥으로 잔의 따뜻함을 감싸 쥐기에는 찻잔의 키가 낮다. 게다가 커피가 잔의 절반이다. 받침 접시에는 아이의 이유식 숟가락만 한 티스푼과 일회용 봉지 설탕이 놓여있다.

주인이 나를 쳐다본다. 커피를 대하는 내 표정을 읽으려는 것일까. 나는 주인이 내 얼굴에 무슨 뜻이 씌었는지 알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해버린다. 이 주인이 나를 읽었다면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니, 손님이 들어서기 전 그날 찾아올 손님의 미음을 읽어놓고 기다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가게 주인이 손님의 마음을 세세하게 읽어 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적어도 그날의 날씨 정도에 따라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커피 잔도 커피 맛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깥에는 종일토록 비가 내린다.

주인이 잔을 내려놓고 아직 발걸음을 떼서 돌아서기도 전에 평소 넣지 않던 설탕 한 봉지를 미적지근한 커피에 과감히 쏟아 붓는다. 그리고 스푼으로 젓는다. 휘휘, 미지근한 커피에 어울리는 손놀림처럼. 심지어 미지근하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 그것을 세 모금에 덜렁 마셔버린다.

길을 가다 폭풍우를 만나더라도 다시 이 커피숍에 올 일이 있을까. 카페인을 마시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분위기와 따뜻함을 마시러 온 나에게는 영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비 오는 날 혼자 찾아온 커피숍에서 주인의 센스에 괜한 억측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커피를 비우자 찻잔은 금세 싸늘해진다. 주인이나 손님이나 둘 다 안타까운 날이다.

다시 빗속을 걷는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인데 그냥 발길을 돌리기에는 아쉽다. 평소 즐겨 다니던 커피숍에 들어선다. 커피 맛이 당겨서 오지만 언제나 시끄러운 곳이다. 사람 소리보다 음악 소리가 더 커서 자연히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숍. 상대방의 소리를 잘 알아듣기 위해 귀를 더욱 기울일 뿐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이나 입모양까지도 신경을 써가며 들어야 한다. 조금한 앉아있으면 소음 때문에 쉽게 피곤해져서 남은 이야기는 남겨둔 채 나오곤 했다. 스피커 볼륨을 조금만 낮춰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건 안 되는 일인가 보다.

손님이 많은 집에는 뭔가 그 집만의 특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인테리어, 질 좋은 서비스, 뛰어난 맛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손님의 마음을 읽어 내는 센스가 아닐까 싶다. 뜨거운 커피를 찾는 사람에게 잔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감각, 차가운 음식이라면 그릇까지 시원하게 해서 내오는 것. 비가 오는 날에 어울리는 음악이라든지, 손님이 많을 때와 적을 때의 스피커 볼륨을 다르게 하는 센스. 이런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고 손님을 배려하며 민감하게 마음을 쓸 줄 아는 집을 찾기 마련이다.

일전에 서울 다녀올 일이 있었다. 낯선 밤거리를 헤매도록 볼일을 끝내지 못했다. 발이 부르트고 배가 고파 어디든지 들어가고 싶었다. 식당들은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주변을 살피다 불이 환한 떡볶이 집에 들어갔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를 손님들이 직접 만들어 먹는 집이었다. 주인은 재료만 준비해줄 뿐이었다. 그냥 손님에게는 심부름꾼인 셈이다. 예쁜 접시에 담긴 맛깔스런 떡볶이가 아니라 손때 묻고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의 떡볶이가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서 뽀글뽀글 끓고 있었다. 깜짝 놀란 것은 손님이 주인을 부를 때였다. “박 군! 여기 좀 오게!”, “어이, 박 군!”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주인은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 “여기요”, “사장님!”하고 부르면 주인은 들을 체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아주 어린 손님이 손뼉을 두어 번 치더니 헤이, 박 군!”이라고 부르자 동업원이 부리나케 달려와 시중을 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별난 음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가 주인 노릇, 왕 노릇을 하게 되는 집. 주인을 맘대로 부려먹는 맛이란 너저분한 가게의 분위기조차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했다. 종업원 누구나가 박 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집. 낯선 서울 바닥을 헤매다 들어선 나는 박 군을 부를 힘도 부치고 기다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주인이나 종업원을 부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호칭 하나에 새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음도 녹아내리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보이는 서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라는 말이 있다. 손님들의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보는 주인의 감각이야말로 최고의 센스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