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내댁 / 공진영
나의 교감 초임지가 예천군 용문중학교이다. 이곳은 이른바 ‘금당 마찔 반서울’이라 하는, 함안 박씨와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다. 아늑한 분지 안에 골기와집들이 옹골차게 들어서 있어, 마치 서울의 한 모퉁이를 옮겨 놓은 듯하다.
내가 하숙한 집도 입구(口)자 골기와집으로, 한때는 울리고 살았던 부잣집이었는데, 근간에 와서 몰락하여 전 재산이라 해야 덩그런 집채와 두어 마지기 텃밭뿐이다.
택호는 포내댁. 미망인인 포내댁이 하숙을 쳐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나고 빈 방이 많아 객지에서 온 공무원 일여덟이 기숙을 했다.
그런데 안주인 포내댁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0대 초반에 70이 넘은 노옹한테 재취댁으로 들어온 것부터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외모가 단정하고 말씨가 세련된 것으로 미루어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을 것이란 이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감기나 몸살에 걸렸을 때 또는 연장에 진일을 당했을 때는 내 일처럼 달려가 치료를 해 주는 봉사 전신에 감동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간호사 전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이도 많았다.
그런데 폄하하는 소문도 만만치가 않다. 음식 솜씨가 뛰어나고 상 차리는 법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면, 도회지의 어느 음식점에 종사했으리란 추측이 있는가 하면, 세련된 몸가짐에 시조창을 비롯하여 우리 민요를 가수 뺨치게 뽑아내는 것을 보면 필경 요정(料亭) ‘나가레’일 거라고 킥킥거리는 이도 더러 있었다.
초로에 접어든 미망인, 하숙을 쳐서 근근이 호구하고 있는 외로운 노파이지만, 이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근동의 누구도 그를 감히 얕잡아 대하는 이는 없었다.
입성을 보면 겨울엔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 여름철엔 옥색 치마에 흰 모시저고리를 받쳐 입길 좋아했다. 부엌일을 하거나 텃밭에서 김을 맬 때를 제외하고는, 항시 외출하는 사람처럼 훤하고 단정한 차림을 하고는 길쌈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가 많았다.
그 해 초가을, 어느 일요일이었다. 월요일에 있을 시범 학교 운영발표회 준비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하고 학교에서 온 종일 설레발을 쳤다. 일을 끝마쳤을 때는 벌써 저녁때가 훨씬 지나 상현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하숙집 주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공휴일은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하숙집에 눌러붙어 꼬박꼬박 끼니를 찾아 먹는 일임을 누가 모르랴.
어디 가서 한 그릇 사 먹고 들어가자고 교무주임의 소매를 끌었더니, 지금쯤 식당엔 술꾼들뿐이고 식사는 안 될 거라고 했다. 식은 밥이라도 한 술 주면 먹고 안 주면 그냥 죽치고 자자며 되레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녁 굶은 시어미처럼 샐쭉해져 있을 주인을 생각하며, 중죄를 지은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은 여기저기 달빛을 골라 디디며 하숙집을 찾아 들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이르니 포내댁이 기다리고 있질 않은가.
“하이고, 와 이렇게 늦었니껴,” 하며 손이라도 잡을 듯이 다가선다.
“학교까지 찾아가려다가 아녀자가 공청에 가는 것이 뭣해서 여기서 기다리니더.” 하고는 앞장을 선다.
대청마루엔 밥상이, 색조가 어우러진 조각보를 덮어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 푸짐한 반찬이었다. 이게 웬 떡인고 싶어 감식을 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포내댁은 하얀 사기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동동주니더. 수고하셨으니 한 잔 드시고 푹 주무시이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교무주임은 술을 밥보다 즐기는 사람이었다.
포내댁 동동주는 소문이 나 있었다. 군 주최 민속주 품평회에서 당당 일등을 차지한 술이다. 노릇한 액체 위에 찹쌀 알갱이가 동동 뜨는 동동주, 입에 대면 입술이 짝짝 들러붙는 차지고 감미로운 술.
교무주임의 강권에 못 이겨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얼근히 취기가 돈다. 하숙생들은 모두 귀가해 버리고, 절간 같은 고대광실에 오직 세 사람만 남았다. 굿을 지겨도 모를 것 같다.
“아지매요. 이럴 때 시조 한 수 읊어 주이소.”
교무주임이 넉살좋게 간청을 하자, 포내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하도 안 해 놔서 될란가 모르겠니더.” 하고는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이윽고 반 모서리를 툭 치더니 목청을 돋우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황진이 시조를 평시조 창으로 뽑는다. 그 꺾이고 떨리고 굽이치는 가락은, 취기에 흔들리는 가슴을 쓸고 가는 바람이 되어 강물이 되었다.
처마 높은 집이라 그런가. 달빛이 대청마루 한가운데까지를 적시며 넘실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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