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론(論) / 백두현
갑자기 코가 막혀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이마에서는 열이 오르고 푸석푸석한 쉰 소리가 목을 타고 갈라져 나왔다. 온몸을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참, 꼼꼼하게도 괴롭혔다. 환절기마다 종종 찾아오는 감기 증세였다. 둘째 아이가 며칠 전부터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내게도 옮긴 모양이다. 아내도 훌쩍거렸고 중학생인 막내도 훌쩍거렸다. 온 식구가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책상에 앉아 글 몇 줄을 읽기도 쉽지 않았고 누워서 드라마를 봐도 감정이입이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이번 감기가 가볍기는 했다. 살다 보면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나 보다. 불청객이었지만 감내해야 할 나름의 이유가 충분한 까닭이다. 내가 아파서, 아니면 아내가 아프고 막내가 아파서 수험생인 둘째의 감기가 나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수능성적에 모래알만큼이라도 밑거름으로 보태질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가족 모두가 훌쩔거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꺼운 마음과 달리 결국 난 훌쩍거리는 식구들을 몽땅 데리고 찜질방에 가기로 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오히려 공부에 뱡해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주말 아침 일찍, 시간을 다투는 둘째만 독서실에 내려 주고 단골 사우나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땀을 흠뻑 내기 위해서다. 땀을 내는 일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감기 치료법이었다.
어렸을 적엔 땀을 내기 위해 할머니께서 내게 쌍화탕을 먹이고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쓰게 했다. 그 속에서 땀을 흠뻑 내고 나면 감기가 낫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할머니가 없고 두터운 이불도 없다. 대신 찜질방에 ‘러닝머신’이 있다. 그곳에서 30분 이산 땀을 흘린 후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것이다. 몸 안의 감기가 땀과 함께 슬그머니 나가 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씻어보는 것이다. 욕탕 안으로 들어갈 때 꼭 수건을 들고 들어갈 것이다. 탈의실로 나오기 전에 물기를 씻고 나오기 위해서다. 물기 있는 몸으로 밖으로 나오면 찬 기운에 물기가 식으면서 나가려던 감기 바이러스가 다시 몸 속으로 들어올 것 같아서다.
감기라는 바이러스는 따뜻한 온도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 몸 안으로 들숨을 통해 들어와 그곳의 따뜻한 체온에 기생한다. 자연스럽게 날숨을 통해 나가버리면 좋으련만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기생만 하면 다행인데 내 안의 온갖 질서를 어지럽힌다. 코로 간 감기는 콧물이 되고 뇌로 간 감기는 두통을 유발시킨다. 천성이 그런 놈이라 술을 먹어 체온을 높이면 더더욱 눌러않는다. 더러운 것도 좋아한다. 움직이지 않고 게으른 사람의 몸에서는 작정을 하고 살림을 차린다. 그래서 감기를 달고 살지 않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잘 씻고 몸을 움직여 땀을 내야 한다. 땀과 함께 다시 몸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이 그렇고 살면서 익힌 나의 상식 또한 그렇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발달한 ‘양의학’은 문제가 되는 병원균을 있는 그대로 제거하는 시스템이다. 우리 몸속에 질병이 생기면 수술을 통해 칼로써 도려내거나 독한 항생제로 말려 죽이는 치료를 한다. 그러다 보니 내 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도 불쾌하거니와 바이러스를 죽이고자 먹는 색색의 항생제가 불편하기만 하다. 그 약의 성분을 내가 알 리 없지만 시각적으로 불편하다면 몸에도 불편한 것이다. 만병의 근원이 마음에서 온다 했거늘 마음이 불편한데 이로울 게 무얼까.
이에 반해 ‘한의학’은 질병의 원인균을 몸 밖으로 몰아내거나 대항세력의 힘을 키워 면역력을 키우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나는 한의학적 치료방법을 선호한다. 병에 따라 반드시 양의학적 치료방법이 필요한 경우도 많겠지만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감기 정도는 민간요법이 내 생각엔 바람직해 보인다. 누군가 의학적인 무지를 탓한다면 의가 아닌 나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그렇더라도 내 몸은 내 의지대로 다루는 법, 나의 선택은 몰아내는 방법이다. 음식도 서양 사람은 서양 음식을 먹고 동양 사람은 동양 음식을 먹는 것처럼 동양 사람은 동양의학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고 믿어서 그렇다.
아무려나 그런 감기는 죽이든 몰아내든 치료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렇게 무의미하기만 한 감기가 사람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넓게 보면 가정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다. 더 넓게 보면 그 못된 것이 나라에도 있고 민족에도 있다. 결코 크지 않은 나라가 둘로 나뉘어 사는 것 또한 일종의 감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나뉜 반쪽에서조차 기역감정으로 서로 헐뜯기만 하는 것은 정말로 심각한 감기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릴 때만 하나가 되는 민죽, 결기가 끝나면 다시 편을 가르고 흠집을 들추기에 급급한 이 나라의 불편한 현실이야말로 정말로 지독한 감기는 아닐까.
이런 것도 내 생각처럼 치료가 필요한 감기라면 한반도를 둘러싼 동해나 남해, 서해가 거대한 욕탕이었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더럽고 오염된 불편부당한 대립들을 땀을 내어 바다 밖으로 몰아내고 싶다. 좌, 우는 물론이요 전라도 사람도, 경상도 사람도, 구석구석 오염된 병균들을 모락모락 땀과 함께 바이러스가 나갈 때까지 씻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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