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아가다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듯 꽃들의 모습이 화사하다. 그중 길가 쪽에 맵시 좋은 꽃봉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에 취한 듯 미소 미금은 연꽃이 고혹적이다. 행여 볼까 살피면서 꽃을 꺾어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 딱 하루였다. 화병 속의 꽃은 하루 만에 고운 모습과 빛깔이 누렇게 변했다. 이승과 저승의 구릉을 오가듯 꽃 한 송이로 인해 기쁨과 서글픔의 혼동이 왔다. 떨어진 꽃잎을 모아 불을 지폈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남편이 떠난 지 여섯 해가 되었다. 세상의 인연을 다 내려놓고 그가 떠난 날 뜨거운 불가마 앞에서 모든 것이 정리된 줄 알았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안내하는 장의사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망자 떠나십니다. 인사 올리세요.”
꽃으로 맺은 인연, 서른 해를 함께 했던 우리는 불 앞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시든 꽃잎을 태우는 동안 불가마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 장면이 왜 그리 가슴 따갑게 떠오르는지. 먼저 기다리면 곧 뒤따라가겠다고 울부짖던 나는, 어직 이승의 삶에 묶여 서성이고 있다.
꺾인 꽃은 자유롭지 못했다. 가정이라는 꽃병 속에 물을 부어주면 그 물로 살면서 한 번도 울 밖으로 나다닌 적이 없었다. 아내로 또 아이의 엄마로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지켰지만 내 안의 나는 담 너머 세상이 궁금했다. 틈만 나면 깨금발로 바깥을 기웃거렸다. 깨진 사발만 보고 살았는지 여자와 사기그릇은 밖으로 돌리면 금이 생긴다고 주장을 하던 남편이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족쇄였다. 차라리 그의 존재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이제는 자유로워졌건만, 그 구속이 사랑인 줄 알고 나니 그리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목적 없는 이정표에 나를 맡긴다. 설마 잊었거니 했는데 아직 떠나보내지 못했나 보다. 어제도, 오늘도 닮은 사람을 찾아 헤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 내가 그를 붙들고 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 했던 혼인서약을 파기한 죄라면서 옭아매고 있다. 그 언약은 하늘에서도 풀렸다는데 왜 거머쥐고 있는지 모르겠다.
매달 말일이면 이승과 저승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딩동” 스마트폰의 알람은 유족연금이 들어왔다는 메시지다. 하늘 은행에서 나에게 보내오는 돈이다. 남편이 주는 돈 만큼 편한 것이 있으랴. 내가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는 이십만 원은 다른 사람의 이백만 원보다 크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손에 든 전화기에 꾸벅 절을 한다.
잠을 잘 때도 그이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 가끔 집에 오는 동생이 뜨악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지만 궁색한 대답을 하고야 만다. 편해서 그냥 편해서 이렇게 산다고 했지만, 그가 내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남편이 아끼던 물건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한 번씩 눈길을 준다. 언제라도 들고 나갈 준비가 된 가방이다. 금속으로 된 가방에는 카메라의 렌즈가 오밀조밀 주머니에 담겨있다. 그는 척척 자동으로 찍히는 디지털카메라보다 아날로그를 좋아했다. 상황에 맞는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초점을 맞추며, 피사체를 조절하는 눈으로 세상에 머물다간 사람이다.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 렌즈를 닦고 장비를 정리하던 그의 흔적을 차마 지울 수 없어 그러안고 산다.
산사에서 만난 스님이 이제는 인연의 끈을 놓으라고 했다.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 숨어있는 추억의 조각들이 전부 공이고 허상이하 한다. 그의 카메라도, 검도를 즐겼던 목검도 또 불 속으로 던지란 말인가. 움켜쥔 내 모습과 놓아야 하는 갈등이 천칭(天秤) 위에서 간당거린다.
단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버린 꽃에 향내가 없다. 퇴색한 꽃잎이 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히니 허무하기 짝이 없다. 한 송이 꽃에 매료되어 웃고 울던 어리석음이 한 줌의 재로 남았을 뿐이다. 부질없는 욕심에 매달려 집착했던 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체 없는 허상을 동경하면서 살아온 삶 그만 내려놓을까 한다. 그의 넋도 이제 보내 주리라. 비록 불의 인연으로 한 줌의 재가 되었을지라도, 소명의 아닌 소박한 한 송이 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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