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수련 / 조경숙

수련 / 조경숙  

 

 

 

"수련을 어디다 치웠나?"

남편의 한 마디로 느긋한 주말이 산산조각 났다. 부리나케 아파트 화단으로 뛰어나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더니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비실에 CCTV가 있어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주말이라 기계조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월요일에야 출근한다고 한다.

자배기에 수련을 키운 세월이 십오 년이다. 누가 수련을 물의 요정이라 말했을까. 아침 햇살의 노크에 금방 씻은 듯한 얼굴을 물 위로 내밀 때는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오랜 그리움 끝에 만난 첫사랑이 이만할까. 그 속으로 빨려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숨이 멎는 듯했다. 올해는 남편이 승진을 하려나. 올해는 아이가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으려나. 진흙 속에 살아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말고 청초한 꽃을 피우는 녀석을 두고 나는 좋은 운세가 오기를 점치기도 했따.

삼 년 전, 이사를 오면서 수련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남서향 집이라 햇볕이 턱없이 부족했다. 해바라기를 하기 위해 무거운 자배기를 옮겨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황산에 담긴 쇠붙이처럼 잎줄기가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흐물흐물 녹아내려 꽃은커녕 살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뿌리를 나누어 작은 고무통에 심어 베란다 밖에 매달았다.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이면 만사를 제치고 허둥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묶어 둔 철사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가뜩이나 바람에 떨어질까 봐 마음 쓰이는데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새들이 와서 물을 먹고 목욕까지 하니 어린잎의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병원으로 보내는 심정으로 화단에 내어놓게 되었다.

꽃 도둑과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 한다지만, 손때 묻은 책도 물론이거니와 자식처럼 키우던 꽃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고려하지 않는 데에 기인한 말이다. 가져간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꽃에 불과할지 모르나 내게는 희망이며 혼이다. 엄연한 범죄임을 밝혀서 출입구에 커다랗게 써 붙이리라. 창피를 줘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야지. 순간의 탐심이 낳은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리라. 가시 돋친 말을 아무리 내 뱉어도 허전함이 가시질 않는다.

하루하루 생기를 찾던 수련이 돌아올 것 같아 몇 번이나 다시 나가 보았다. 햇빛의 꼬리가 점점 서쪽 하늘로 사라지면서 몸 안의 기운도 함께 빨려나갔다. 그러기에 나는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닮고 싶어 매일 눈을 맞추고 물을 주며 가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가 키운 것은 무서운 집착과 욕심뿐이었다. 아침에 피었다가 밤에는 잔다하여 수련睡蓮이다. 그토록 해를 좋아하는 녀석이지만 어둠이 밀려오면 얽매이지도 집착하지도 않고 꽃잎을 접는 것을 보아도 보지 못했다.

입안이 깔깔해 밥을 먹지 못하고 있으려니 남편이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며 점새늪으로 차를 몰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연밭이다. 흐드러지게 핀 홍련의 향기가 하늘 가득 풍겨온다. 바람에 스치는 연잎 소리가 스님의 독경인 듯 분탕질 치던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이제는 놓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 남은 삶 속에 얻기보다 잃어갈 것이 더 많을지 모른다. 아무리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텐데 그 때마다 이렇게 속을 태운다면 결국 허상에 꺼들려 인생을 소비할 뿐이라고 일러준다.

수련을 찾는다 해도 나는 다시 화단에 내놓을 수밖에 없고 마음은 언제나 수련 자배기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웃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들이대지 않을 자신이 없다. 훔쳐 갈 만큼 탐이 났으니 곱게 키워주기를 빌었다.

'수련은 햇빛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온 종일 햇볕 속에 내놓아 주십시오. 일 년에 한 번쯤은 마른오징어 다리 한 개를 흙에 묻어 주면 거름이 되어 꽃이 잘 필 것입니다.' 화단에다 이른 푯말을 붙인다면 아직도 집착을 버리지 못했음이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