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박종희
알맹이를 빼먹어 속이 빈 소라껍데기가 어항 속에 있다. 쫄깃쫄깃한 소라 살을 빼 먹고 나니, 그 큰 소라는 속이 비어 빈집이다. 내장까지 모두 비운 소라껍데기를 씻어 어항 속에 넣어 두었더니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 때는 바다에서, 바다가 키워주는 대로 짠 소금물을 받아먹으며 늙어 갈 것이라 생각했던 소라가, 이젠 어항 속 금붕어들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몇 해 전에 남편이 어릴 때 살았던 집에 갔었다. 생전에 아버님이 많이 아꼈던 집이라 남편은 늘 그 집을 다시 사고 싶다고 했었다. 터가 좋아 그 집으로 이사한 후 돈도 모으고 집안일이 잘 풀렸다고 했던 집은, 남편이 떠나온 후 30여 년이나 지나 앙상하게 뼈만 남아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빈집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주인행세를 했다. 허벅지까지 키를 키운 잡초를 헤집고 들어서자, 집을 지키고 서있던 망초대가 바짝 긴장을 하고, 장독대엔 깨진 항아리 조각이 나뒹굴었다. 뒷마당엔 해마다 실한 열매를 맺어 아버님 사랑을 듬뿍 받았다던 석류나무가 사람처럼 갱년기를 맞이했는지,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남편이 살았던 집이지만 밤이었다면 무서워 한 발짝도 못 들여놓을 것 같은데, 남편은 구석구석을 돌아보다 굳게 잠긴 안방 문 앞에 섰다. 자물쇠도 없이 숟가락을 내리꽂아 잠가 놓았지만, 반쯤은 떨어져 나간 문을 여니 눅눅한 습기에 젖은 벽지가 요실금을 앓고 있듯이 얼룩얼룩하고, 뜨거운 군불에 눌어붙은 장판은 구들장이 훤히 드러났다.
부엌을 들여다보니 불을 지피던 아궁이엔 아직도 까맣게 그을린 연기 자국이 남아 있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부뚜막엔, 누군가 물을 마시다 놓아둔 깨진 바가지가 덩그러니 혼자 놓여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천장이 반쯤은 내려앉은 아랫목에서, 밥주발을 묻어두고 남편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호롱불 아래서 이불 홑청을 시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공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던 자식들은, 아버지 손에 들린 주전부리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마흔 살이 넘어 장만한 집이었고, 오 남매를 키우며 그곳에 뼈를 묻고 싶어 하셨던 아버님이 떠나신 지도 10여 년이 지났고, 그 사이 몇 번의 주인이 바뀌면서 집도 홀로 사는 노인처럼 쓸쓸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쉽게 허물어진다. 집도 사람이 등을 기대고 살아야 숨을 쉰다고 한다. 아무리 오래된 집도 사람의 훈기를 받으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안주인이었던 어머니가 쇠퇴해지듯이 집도 늙어가는 것이다. 집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사람의 모습과 흡사할까. 이가 모두 빠져 잇몸으로 식사하시는 어머니처럼 빈집도 서까래가 무너지고 방구들이 모두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몇 년째 요양원에 누워 계신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어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종일 병실에서 하얀 벽을 바라보다 아들 며느리라도 눈에 띄면 반색을 하신다. 비록 몸은 따라주지 않지만 보고 싶은 자식을 기다리는 어미의 마음은 누구 못지않으신 게다.
어머니 연세의 다른 분들보다 훨씬 체격도 좋고 단단하던 몸이 몇 년 사이에 살이 다 내렸다. 가늘어진 손마디엔 뼈만 앙상하다. 억지웃음이라도 보려고 어머니 앞에서 응석을 부리다 일어서면,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금방 서운한 얼굴이 된다. 집도 사람이 살아야 훈기가 나듯 어머니도 누군가 옆에 있어 줄 때만 생기가 난다.
살을 내어주고 껍데기만 남은 소라나, 사람이 떠나버린 빈집처럼 오 남매를 길러낸 어머니의 가슴도 빈집이다. 아무것도 더는 내놓을 것이 없는 빈털터리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돌아갈 때는 모두 비우고 떠나는 것 같다.
어머니는 요즘 당신이 집착했었던 삶의 목록들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신다. 당신이 귀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좋아하던 것들도 잊어버리고 가장 본능적인 것 외엔 관심이 없다. 그러다 가끔씩 떠오르는 녹슨 기억의 사슬에 얽힐 때면 어머니의 눈가는 붉은색으로 물이 든다.
어머니를 보며 생각한다. 삶이란 그저 애착이고 집착이라는 것을, 사는 동안에 잠깐의 애착만 내 것일 뿐, 잠시 세 들어 살다 비워주고 가는 빈집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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