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휘파람 / 구활
쌈은 예술에 가깝다. 예술 중에서도 미술 쪽이다. 쌈거리가 푸짐한 식탁을 대하면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은 것처럼 엷은 흥분이 일곤 한다. 밥과 반찬은 입맛 당기는 대로 입에 넣어 씹으면 되지만 쌈은 그렇지 않다. 재료를 차례대로 손바닥에 쌓아 올려야 하고 된장이나 갖은 양념 또는 젓갈 국물로 덧칠을 해야 제 맛이 난다. 그래서 미술이다.
초여름 상추쌈은 입맛을 돋궈주는 별미 음식이다. 남새밭에서 솎아온 옛날 기차표만한 상추 한 소쿠리를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기도가 절로 나온다. 다른 반찬은 별 필요가 없다. 독 에서 갓 퍼온 노오란 된장, 그것도 낟알 콩이 듬성듬성한 날된장만 있으면 보리밥 한 그릇은 뚝딱이다.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여린 상추는 밥도둑이다.
상추쌈을 쌀 땐 밥보다 상추가 많아야 한다. 파 마늘 풋고추를 다진 쌈 된장도 해롭진 않다. 그러나 고졸하고 담백한 맛은 역시 참기름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은 날된장이 제격이다. 무대의상보다 누드가 더 아름답듯 화려의 극치는 역시 소바이다.
한여름 반찬으로 호박잎쌈을 빼 놓을 수가 없다. 반드시 조선호박의 잎이라야 한다. 호박잎쌈을 위해 된장을 끓일 땐 많은 재료를 넣으면 안 된다. 맹물에 굵은 멸치 몇 마리와 대파 몇 쪽 쯰우고 고추를 듬뿍 썰어 넣으면 그만이다. 여기에 두부를 넣는 것까지도 사치에 속한다. 해변의 사장이 아름다운 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에 발목을 걸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물새 떼나 맹물 된장국에서 헤엄치는 멸치는 그냥 소도구에 불과하다.
손바닥 뒤로 넘어지는 호박잎 위에 밥 한 술 올려놓고 된장국 한 숟갈을 끼얹으면 손가락 사이로 국물이 줄줄 새나간다. 이때 호박잎을 얼른 뒤집어 한 입 가득 밀어 넣으면 여름이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젠장, 왜 이리 바쁘냐."고 한 소리를 한다.
나는 밥솥 안의 밥물이 넘쳐 들어간 멀건 된장국을 좋아한다. 그걸 먹고 있으면 비오는 날 아무도 없는 암자의 빈방에 앉아 있는 그런 느낌이다. 걸레 스님 중광도 풋고추 된장국을 즐기시다 돌아가셨다. "매운 고추 많이 넣어, 다른 건 넣지 마." 된장국 얘길 하고 있으니 스님이 몹시 그립다.
옛 중세 유럽, 황제와 신하들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먹었다. 다만 틀린 것이 있다면 황제 앞엔 좀 더 많은 소스와 향신료가 있었다. 향신료는 황제와 신하를 구분 짓는 간극이다.
음식을 먹을 땐 음식에 맞는 양념을 챙겨 먹어야 한다. 옛 어른들은 부침개를 먹을 땐 양념조선간장에, 제사 음식의 지짐은 맨 간장에 찍어 먹었다. 우엉 잎 쌈과 양배추 찐 것은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조선간장으로 먹는 것이 옳고 미역과 다시마는 맛있는 젓갈 국물로 쌈을 싸먹는 것이 좋다. 균형 배열 조화란 말은 결국 궁합처럼 어울림을 말하는 것이다. 음식의 첫째 조건은 재료와 양념의 아름다운 조화를 뜻한다.
젊은 시절 몇 해 동안 동해의 월포리란 포구에 자주 나다닌 적이 있다. 그곳 정치망 그물을 걷어 올리는 뱃사람들을 따라 새벽바다에 나가면 육지에선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신나는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고등어를 나뭇잎 크기로 포를 뜨고 밥 한 술에 날된장과 통 마늘 한 개를 얹어 먹으면 정말 기막힌 고등어 쌈밥이 된다.
고등어는 숨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부패가 시작되기 때문에 육지에선 날 것으로 먹을 수 없다. 뱃전에 기대 앉아 막소주 한 잔에 고등어 쌈이라. 생각만 해도 육관肉管악기의 나팔격인 입술을 타고 푸른 휘파람이 터져 나온다. 오! 홧 아 원더풀 월드(Oh! what a wonderfu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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