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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아버지 / 박종희

아버지 / 박종희

 

 

 

시골에서 부농에 속했던 큰고모 댁에 가면 소 세 마리가 있었다. 황소와 어미 소,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송아지였다. 송아지가 자라 몸집이 커지면 코뚜레를 해야 했다. 생살을 뚫어 코뚜레를 하고 외양간에 갇힌 채 다른 동물들처럼 마음대로 뛰어다니지도 못했다.

배가 불러올 때까지 농사일하던 어미 소는 새끼를 낳고 며칠 쉬는가 싶더니, 어린 송아지를 앞세우고 다시 밭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에 나간 소는, 해거름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종일 일을 하고 지쳐 워낭소리만 쩌렁쩌렁 내며 대문을 들어서던 소가 측은해, 밤잠을 설치던 날들이 생각난다.

소 없이는 농사짓기 힘들던 시절에, 소는 묵묵히 한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농사철에는 소 한마리가 해내는 일이 사람 몇 명이 하는 일보다 많았다. 사람이 하려면 며칠씩 걸리는 밭일도 소를 부리면 단숨에 갈아치웠다.

그의 넓은 등에는 언제나 길마가 지워져 있었다. 불룩불룩한 등뼈 때문에 짐을 싣기 불편하니 사람들이 씌워 놓은 안장이다. 길마가 덮인 등은 물건을 실어 나를 때에 운반구가 되었다. 농한기가 되면 등이 휘도록 땔감을 져 나르고, 장날이면 곡식을 싣고 수십 리 길을 걸었다.

소의 등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소의 지친 등을 등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그저 짐을 싣고 농기구를 거는 도구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육중한 몸을 지탱하기에도 약한 다리를 가진 소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짐이 무거워 다리가 휘청거리면 우적우적 되새김질로 슬픔을 삭였다.

금방이라도 저벅저벅 걸어 나올 것 같은 소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버지도 그랬다. 노역을 하고 사는 소의 운명처럼 아버지의 일생도 고단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늘 근무복을 입고 계셨다. 이름표가 달린 회색 옷을 입고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집과 회사를 오가는 분이셨다.

저녁이면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정문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경비실로 뛰어가면, 아버지는 얼른 달려와 등을 내밀었다. 피곤하실 텐데도 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는 마중 나온 딸을 업고 걸었다.

아버지 등에 업히는 것도 신이 났지만, 매일 저녁 참새처럼 방앗간을 들르는 재미에 퇴근시간이 기다려졌다. 회사 모퉁이를 돌아서면 가게가 있었다. 지금은 구경할 수 없는 '라면 땅''자야'가 그 시절엔 최상의 군것질거리였다. 아버지는 까만 봉지에 수북하게 과자를 사서 손에 쥐어 주셨다. 집에 오면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들었지만, 동생과 내가 아버지를 마중 나가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가게에 들르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아릿하다. 육 남매에 작은집 사촌 세 명까지 같이 컸으니, 식구가 열 명이나 되었었다.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일흔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는 일을 놓지 않고 직장을 다니셨다.

내가 업혔던 자리가 아버지에겐 등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소의 등이 수레인 줄 알고 짐을 실었던 것처럼, 지쳐 있는 아버지의 등에 업힌 내가 아버지의 짐이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딸아이를 업고 남편을 기다릴 때나, 잠투정을 하는 딸아이를 업어 재우고 등이 뻐근할 때면, 내가 업혔었던 아버지의 등이 생각났다.

나는 고작 딸애 하나 키우면서도 자주 몸살을 앓았는데, 열 식구를 거느렸던 아버지의 등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평생 일만 하신 아버지의 등이 구부정해 이젠 할아버지의 모습이 역력하다. 어쩌면, 아버지의 등은 나를 업고 걷던 그때부터 휘어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찜질방에 가면 황소 그림을 못 본체 할 수 없을 것 같다. 선하고 슬픈 눈을 가진 소와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성을 낼 줄도, 짖을지도 모르는 우직한 소의 성품이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청력을 잃고도 많은 명화를 남긴 김기창 화백은 어떤 마음으로 소를 그린 것일까. 혹시, 듣지 못하니 말까지 잃어버린 자신의 속내를 생각하고 그린 것은 아닐지.

아버지의 귀에는 보청기가 꽂혀 있다. 워낙 큰소리 한번 안내시던 과묵한 분인데, 귀가 멀어지면서 말수가 더 적어지셨다. 보청기를 끼어도 전화로 하는 대화는 전달이 잘 안 되나 보다. 아버지와 통화하고 나면 가슴이 아프다. 때론 엉뚱하게 다른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 대답에 맞장구치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날이 많다. 비록 전화로 아버지와 소통이 어렵다 해도, 나는 습관처럼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아버지 목소리를 얼마나 더 오래도록 들을 수 있을까. 윙윙, 해가 갈수록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보청기 울리는 소리는 워낭소리처럼 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