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손 / 남영숙

/ 남영숙

 

 

 

금방 세수한 얼굴은 그대로 식물성이다. 일체의 상념을 씻어낸 표정이다. 톡톡 화장품을 바르는 목과 얼굴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수고한 손에겐 화장품이 아껴진다. 보습제 하나면 그만이다. 문득 노고에 비해 소홀히 대접받는 손에 대한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연결고리의 시작이 되는 신체의 부분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손이 있어 가능해진다. 인간의 인프라인 것이다. 생활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보병처럼 묵묵하다. 음식을 해내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글씨를 쓰며 반가운 이의 손을 덥석 잡고, 온갖 궂은일과 즐거운 일에 첨병으로 나선다.

그렇게 세상과의 만남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엮어주는 최초의 동작도 손에서 시작된다. 처음으로 이성과 손을 잡던 따스하고 말랑한 촉감과 가벼운 떨림을 우리는 갖고 있다. 그런 손잡음이 아니어도 진한 우정을 느끼거나 의기투합되어 저절로 잡아지는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느낌, 그것은 그대로 말이다. 어깨를 겯고 가자는 의중의 표현이다. 손이 하는 말은 입이 하는 말보다 때때로 더 강렬하다. 승리의 약속이나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작별의 의식이 그러하다. 손에서 말이 열리고 닫히는 수화라는 아름다운 소통의 기능도 있다. 언어의 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그것이 없다면 그 기능을 대신할 마땅한 신체기관은 아무리 고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손이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 중에 세계의 공통 인사인 악수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여인들의 살가운 손잡음도 좋지만 남정네의 힘찬 악수 뒤의 포옹은 빙산도 녹일 듯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악수의 기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왼손잡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났다고 한다.

노상에서 마주친 여행자들이 무기가 없음을 보여주는 의식으로 서로 손을 내민 것이 악수의 기원인데, 무기는 오른 손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오른 손을 내밀면 무기가 없음이 증명되지만 왼손을 내밀면 오른쪽에 무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왼손잡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생겨났다고 한다. 나폴레옹이나 간디, 모차르트, 그리고 슈바이처와 처칠, 빌게이츠가 왼손잡이라는데 그들도 왼손으로 악수를 할까.

악기와 어우러지면 아름다운 소리를 긷고, 화폭 위로 옮겨 가면 세상의 풍경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손은 인체의 감각 기관의 삼분의 일이 집중되어 있고, 신체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어 그것을 제대로 다스려주면 건강에 매우 이롭다는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으뜸은 손을 따스하게 해주는 것이고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 자주 씻어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

손의 해부학적 설명을 빌어 보면 14개의 손가락뼈, 5개의 손바닥뼈, 8개의 손목뼈와 수많은 관절과 근육, 인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죽을 때까지 이천오백 만 번 정도를 굽혔다 펴기를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래도 지치는 법이 없으니 인간이 만든 어떤 고성능의 기계가 그렇게까지 탈없이 쓸 수가 있을까. 생명공학의 현란한 발전으로 복제아까지 탄생할 모양이지만 신의 영역을 넘보아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은 재앙의 부메랑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신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금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응징할 뿐.

세월은 손끝으로 가장 먼저 지나간다. 그리하여 손은 인생의 증명사진이 된다. 어릴 적, 가끔 오시는 외할머니의 꺼끌하고 뭉툭한 손이 한때 섬섬옥수였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길쌈과 누에고치, 삯바느질로 가난하게 사신 외할머니는 혼인하기 전에는 부잣집 딸이셨다. 흔히 "어디를 가려면 아무개 땅을 밟지 않고는 못 지나간다"는 말로 대변되는 대지주의 딸이었던 것이다. 훈장을 들여, 남매간에 같이 시킨 공부는 총명한 외할머니가 늘 오라비를 능가하니 쓰잘데없는 계집아이만 일취월장이냐고 더 이상 배움의 은전을 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양반 좋은" 외할아버지와 혼인한 외할머니는 남편의 무능과 이른 사별로 반평생을 손재주로 살아내셨다. 그 시절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을 명서갛은 슬하의 자녀들에게 대물림 되어 말년의 일신은 편하셨다.

외씨버선같이 태깔이 고우셨던 할머니는, 손은 옹이 맺혀 투박하였다. 그 손으로 장난감 버선도, 각시 인형도 만들어 주고, 열손가락으로 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신기한 실뜨기 놀이도 어린 나와 재미있게 하셨다. 추운 겨울 빳빳하게 풀 먹여 다듬이질 한 옥양목 이불 호청이 차가울까 아랫목에 미리 깔아 따뜻이 뎁혀주셨다. 꺼끌하지만 따슨 손으로 어린것의 탈이 난 배를 쓸어주고 이마를 만져주면 신기하게도 배가 편안해졌고 열이 오른 이마는 식어갔다. "약손"이 손의 기능 중에 압권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실제로 과학적인 설득력이 있는 치료법으로 플라시보, 즉 위약僞藥효과라고 하는데 어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이의 믿음이 가져오는 일종의 최면효과라는 것이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 자신이 약손이 되어야 할 즈음에 이르러 가는데도 아직, 가끔씩 찾아오는 흉통을 다스리지 못하고 할머니의 온기 있던 손을 그리워한다. 마음앓이에도 그 효험이 신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