쟉별 / 박옥근
수평선에 걸려 있는 하늘은 구름 한 조각 없이 말갛고,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물결마루는 뱃사람의 억센 팔뚝처럼 힘이 넘친다. 쏴쏴 밀려오는 파도가 빚어낸 하얀 물거품은, 해안선을 물고 있는 모래사장과 조약돌밭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청량한 바람을 타고 오는 비릿한 짠 내음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한 폭의 수채화를 생각한다.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포리 흑포마을이다. 눈앞에 펼쳐진 경관을 한참 즐기다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모래톱을 지나 조약돌밭을 걷는다. 돌들이 자그락자그락 즐거운 소리를 한다. 발걸음을 멈춘다. 잔돌 하나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 본다.
조약돌의 본디 모습은 기암으로 된 석벽이었을 것이다. 형상을 미처 짚어볼 수도 없는 거대한 원시동물의 뼈였을 것이다. 산 중턱에 걸려 있던 암석 무더기가 바다로 가고자 뒹굴어 내려오면서 깨지고 부서진 그러한 형태였을 것이다.
파도는 암석해안의 지표를 깎고 바윗돌을 쪼개어 밤낮없이 어루만지며 매끄러운 돌밭을 만들어 놓았다. 암석으로 뒤덮인 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을 다시 파도가 삼키고 뱉어내는 동안 꺼칠한 모가 반질해졌다. 수천만 번의 깎고 쓰다듬는 작업을 파도는 마다하지 않았다.
흑포마을 남단 해안도로에 촛대바위가 있다. 지금은 촛대바위라고 부르지만 예전엔 버선바위였다. 촛대 모양의 바위 위에 버선을 닮은 바위가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 촛대바위는 해안침식으로 말미암아 기반암이 육지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버선바위의 변형이 아닐까 한다. 버선 모양의 바위는 어느 날 파도가 꿰차고 나들이하듯 바다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떨어져 나갈 때 생긴 바위의 작은 살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온갖 돌들과 서로 부대끼며 뒹구는 동안 조약돌이 되었을 터이다.
수많은 세월은 조약돌을 깨뜨리고 깎아서 모래로 만들고, 모래를 다시 쪼개고 마모하여 흙으로 만든다. 끝내는 그 흙마저도 미세한 먼지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조약돌을 다시금 눈여겨본다. 동글동글한 돌, 길동그란 돌, 세모 둥그런 돌, 네모 둥그런 돌. 흰 돌, 검은 돌, 갈색 돌, 누르스름한 돌, 불그스름한 돌. 마치 인간세상의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 등 다양한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을 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돌이 인간의 모습이다.
뾰족뾰족 모난 마음들 서로서로 보대끼며 얼마나 아팠을까. 참고 견딘 크고 작은 아픔을 함께하느라고 때로는 물새가 날아와 함께 울었으리라. 파도가 오며가며 어루만졌겠지. 저토록 둥글둥글한 마음과 형상이 그저 될 리는 없다. 염천의 불볕에 데고 쓰라렸던 시간들, 설한의 칼바람에 꽁꽁 얼어붙었던 나날들, 소금기에 절여졌던 짜디짠 삶의 조각들, 태풍 해일에 뼈가 으스러지도록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졌던 고통의 순간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속내를 장대비 속에서 통곡했던 세월이 조약돌의 삶이었으리라.
조약돌은, 지금껏 살아온 내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 기대했던 집착을 떨쳐내라며, 미움이나 원망 따위를 떼어내라며, 심지어 집 안에 쌓아둔 불필요한 물건마저도 내다버리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며 넌지시 일러주기까지 한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조약돌이 차르르차르르! 파도에 쓸리는 소리를 한다. 생이 깎이는 아픈 소리인데 나는 즐거운 소리로 착각하고 있었다. 한 줌의 먼지로 다가가는 소리임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약돌의 옛말이 “쟉별”이라고 한다. 쟉별! 쟉별! 하고 입속말로 읊조리자 작별(作別)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조약돌이 쟉별이라면, 쟉별의 삶은 몸과 마음을 피나게 깎고 다듬는 몸가짐이겠다. 닳고 깎이는 것은 작아지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작아지고 가벼워지는 것은 작별(作別)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영겁 속에서, 낮은 곳으로 온 돌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 아래쪽으로 점점 내려앉은 돌들이 쟉별이 되듯 나도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과 작별(作別)할 날을 위하여 아래로 내려앉아야 한다. 이 또한 작별(作別)을 준비하는 자세다.
햇빛에 반사된 쟉별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반짝거린다. 쟉별은 모래알보다 더 작아지기 위해, 새털보다 더 가벼워지기 위해 오늘도 제 몸이 줄어드는 고통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있다. 차르르차르르! 쟉별이 작은 별처럼 반짝인다.
돌밭에서 배우고 익히는 삶의 길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나는 조약돌 하나를 손에 꼭 쥔다. 산포리 흑포마을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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