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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옛 정 / 정해경

옛 정 / 정해경


 

 

비서가 바뀌었다. 미스 신과 미스 구. 이 바닥에서 비서를 들일 때는 갓 취업을 나온 신출내기를 선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미스 신은 이미 한 줄 경력이 있다. 얼마 전 아들에게 뽑혀 온, 그에게는 비서라기보다는 연인이었던 그녀, 아들은 그런 미스 신을 내게 넘기고 유학을 가벼렸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먼 길을 떠나면서 두고 가는 것이 어찌 그녀뿐이었을까 마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그녀를 손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여기 있을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 어찌나 만지고 쓰다듬고 손아귀에 쥐었는지 크고 작은 흉터가 얼룩처럼 가득했다. 그로 인해 내게로 오자마자 박피수술부터 받아야 했다.

반면, 4년 넘게 내 곁을 지키며 그저 비서 노릇에 충실했던 미스 구. 누가 보아도 그녀는 한물간 세대였다. 슬쩍 터치만으로 소통이 가능한 미스 신에 비해 힘주어 눌러야만 비로소 감을 잡는 둔감한 센스, 게다가 업무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져 인터넷이 뭔지 카톡이 뭔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더구나 오랫동안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기본세력도 바닥이어서 잠깐 방심하다보면 지쳐 나가떨어지는 일도 허다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시 일을 놓았던 미스 신이 미스 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냉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진즉에 아는 사이지만 미스 신은 내게로 오면서 나름대로 새롭게 치장을 했다. 아들의 연인이었을 때는 무채색 옷만 입던 그녀가 분홍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발목 부분에 앙증맞은 사과 문양도 새겨 넣었다. 징징거리는 저음의 목소리는 상쾌한 컬러링으로 바꿔 산뜻함을 더했다.

미스 구와 업무 인수인계까지 일사천리로 끝내버린 그녀는 채용되는 순간부터 옛일은 모두 잊은 듯,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입 안의 혀같이 감겨들었다. 어느새 주소를 익혔는지 내 앞으로 오는 기나긴 편지도, 단 한 줄의 메시지도, 카톡을 타고 오는 외마디 음성도 놓치지 않고 분류, 정리하여 단정하게 내밀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찾는 어떤 사람도 초성만 알려주면 만남 빈도에 따라 일렬로 세워놓고 그 중에 하나 선택해 주기를 공손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인터넷이 필요하면 어디서든 창을 열어주고 사전이 필요하면 나라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즉시로 대령했다. 나는 그녀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전해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미스 신이 이렇게 깜찍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늘 사랑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목소리는 낯설었고 주 업무인 외부 손님 연결코드가 자꾸 빗나가 연결되었나 싶으면 이미 끊어져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는 영악한 만큼 당돌했다. 절대 나의 군뜸을 모르는 척 눈감아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미스 구가 생각났다. 내게 너무 익숙한 옛 비서. 새 비서의 반밖에 안 되는 체구에 서로에게 길들여진 것을 증명하듯 손때 묻은 얼굴 가장자리는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긴 세월을 같이하다 보니 오래된 연락처까지 낱낱이 기억해 소중한 친구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냈다. 그 뿐인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뭔지 말 한 해도 다 안다는 듯 나 합격이야.”란 아들의 들뜬 음성을 생생하게 전해주던 다정한 그녀.

그랬던 그녀가 은퇴할 때가 아님에도 퇴출을 당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나 둘 수집했던 지인들의 연락처까지 미스 신에게 몽땅 넘겨주고 머리를 하얗게 비워버린 채 이제 다시는 낼 일 없는 목소리를 울음처럼 삼키고 멀찌감치 물러서려 하는 미스 구.

그때, 내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한 가지 역할만 해 주면 한 되겠느냐고. 맡겨진 임무는 새벽 시간에 나를 깨우는 일이었다. 머리맡에 불침번을 세워놓고 잠들었다가 정한 시간이 디면 다소 시끄러운 소리로 잠에서 불러내는 일, 오랫동안 그 음성에 익숙해져 부르는 기색만 보이면 힘 안들이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미스 구는 이제 밤에만 내 곁을 지켰다. 단순한 업무였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다. 일주일 중 5일을 정확하게 하루에 한 번씩 전과 같은 목소리로 나를 때우고 반드시 내 수신호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단 몇 초를 종알거리고 또다시 긴 침묵에 빠져야 하는 그녀.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사람을 찾아내고 말을 잇고, 끊고, 전하였던가. 길을 찾는 일도, 하루하루의 계획도 알고 있는 것은 아낌없이 꺼내 보여주던 오래된 비서. 그런대로 아직은 곁에 두어도 괜찮았을 것을. 새 비서의 능력이 뭐 그리 필요해서 주저 없이 바꾸었을까.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한 번 저지르고 나면 쉽사리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어디 이 일 뿐이던가.

전철에서도 마트에서도 미스 구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미스 신을 바라봤다. 하지만 낯익은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내 것도 아닌 것이 남의 것도 아닌 것 같은 모호함과 떠나버린 아들. 그리고 미스 구가 겹쳐 떠올라 한동안 그저 우울했다.

어느 날 새벽, 미스 구가 나를 깨우는 것을 잊었다. 하루 한 번 만나다보니 기력이 다해 탈진한 것을 깜빡 놓쳐버린 것이다. 얼른 줄을 찾아 연결하려다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정돈하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오고, 흐르는 것들은 흐르게 내버려두자. 아직은 아니라고, 때가 안 되었다고 붙잡아 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도구도 사람도 세월도, 오고 사고 흐르면서 숱한 인연으로 얽히는 것. 떠나보내고 아쉬운 것이 어찌 그녀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