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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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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소리꾼 / 최병영 소리꾼 / 최병영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소리꾼이 단가短歌로 마른 목을 푼다. 목청에 촉촉이 물기가 어리자 이내 본 사설로 넘어가면서 아니리부터 내놓는다. 소리꾼이 열린 소리로 세상을 열어간다. 세월처럼 닳아버려 오히려 새로운 옛 소리를 끌어낸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물혹으로..
[좋은수필]이맛돌 / 조이섭 이맛돌 / 조이섭 생일상을 받아 든 아내가 에멜무지로 한마디 툭 던진다. 영이가 생각난단다. 든든한 두 아들 내외를 보니, 오래전에 이맛돌처럼 사위어 간 딸아이가 꼭꼭 여미었던 가슴을 파고들었나 보다. 이맛돌은 아궁이 위의 앞부분에 가로로 길게 걸쳐 놓은 돌이다. 아궁이에 불을 ..
[좋은수필]볼펜을 꽂으며 / 박양근 볼펜을 꽂으며 / 박양근 어떤 물건이든 곁에 두고 쓰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묻어난다. 값이 나가지 않더라도,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피가 통한다는 느낌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손끝에서 빠져나가면 온몸의 기운이 덩달아 쓸려 나가는 기분에 빠질 때도 있다. 옛 사람들은..
[좋은수필]빈 들에 서다 / 김잠복 빈 들에 서다 / 김잠복 나는 칠푼이다. 남편은 아내만을 걱정하는 팔푼이다. 둘은 바보가 되어 빈 들에 섰다. 세상은 고요하고, 마른 바람 소리뿐이다. 아랫도리에 힘을 주고 정신을 가다듬어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연두색이 꼬물거리던 봄, 기름을 바른 듯한 녹색의 수런거림을 지나, 뒤..
[좋은수필]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가족에게 마음 전하고 싶은 날에는 생선을 굽고 싶어진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사과하기 쑥스러울 때, 미안한 줄 알면서도 그냥 덮어버리고 싶을 때, 유난히 사랑스러워 더욱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생선가게로 간다. 이런 날은 가시가 많은 생선을 고른다. 주..
[좋은수필]좋은 날들 / 박경대 좋은 날들 / 박경대 과음으로 늦게 일어난 아침, 식탁에는 아내가 솜씨를 발휘한 시원한 콩나물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기분이 좋다. 휑한 오전의 LP카페,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들으며 혼자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그윽한 향은 나를 즐겁게 한다. 손자와 함께 들린 소아과에서 주사를 맞으..
[좋은수필]벽 / 허세욱 벽 / 허세욱 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
[좋은수필]홀로서기 / 장수영 홀로서기 / 장수영 아침 안개가 들녘위에 이불처럼 누워있다. 안개 속에 잠긴 절집을 기대하며 팔공산 자락에 구름처럼 머무는 거조암을 찾았다. 절 초입에 들어서면 가지런한 담장너머로 반쯤 가려진 영산전이 단아하게 앉아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마음이 바빠진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