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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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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꽃을 사랑하는 것은 / 안재진 꽃을 사랑하는 것은 / 안재진 내가 꽃을 그리워하는 것은 향기 때문이 아니다 긴 겨울 육중한 어둠을 걷으며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는 거룩한 순정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꽃을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저버리지 않고 가슴마다 불을 지피는 간곡한 속삭임을 알기 때문이다
[명시]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환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 -아주버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 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흐르른 푸른 ..
[명시]너무 오랜 기다림 / 유 하 너무 오랜 기다림 / 유 하 강가에 앉아 그리움이 저물도록 그대를 기다렸네 그리움이 아침내 강물과 몸을 바꿀 때까지도 난 움직일 수 없었네 바람 한 톨, 잎새 하나에도 주술이 깃들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은 모두 그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매순간 반딧불 같은 죽음이 오고 멎을 듯한 마음이 지..
[명시]동행 / 이향아 동행 / 이향아 강물이여, 눈 먼 나를 데리고 어디로 좀 가자 서늘한 젊음, 고즈넉한 운율 위에 날 띄우고 머리칼이 와서 우짖는 햇살 가늘고 긴 눈물과 근심의 향기 데리고 함께 가자 달아나는 시간의 살침에 맞아 쇠잔한 육신의 몇 십부지 얼마, 감추어 꾸려둔 잔잔한 기운으로 피어나리 강물이여 흐르..
[명시]나의 가족 / 김수영 나의 가족 /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 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
[명시]거리에서 / 이원 거리에서 /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 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
[명시]당신이 왕이라면 / 이해인 당신이 왕이라면 / 이해인 구해야 할 자들이 하도 많아 혼자서 처절히 피흘 죽은 당신이 진정 왕이십니까 온통 귀먹고 병든 세상에 산천이 울리도록 큰 대답 주십시오 당신이 왕이라면 살아 온 당신을 향해 또다시 밤마다 칼을 가는 자들이 유다와 함께 횃불 들고 달려오는데 당신을 모르노라 고개 흔..
[명시]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