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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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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백(白) 목련 / 임만빈 백(白) 목련 / 임만빈 2월 중순에는 목련나무에 꽃눈이 돋는다. 꽃눈은 붓 모양을 하고 솜털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솜털로 덮인 붓 속에는 연초록빛을 띤 흰 꽃잎이 겹겹이 포개져 3월의 햇빛을 고대하고 있다. 귀를 기울여 보라. 움트는 소리가 들린다. 솜털을 주시해 보아라. 발로 차는 아..
[좋은수필]입춘대길立春大吉 입춘대길立春大吉 / 김애자 열흘째 영상매체와 활자에 빗장을 걸고 지낸다. 가끔씩 이렇게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면 삶의 여백이 넉넉해진다. 거실 소파에 앉아 종일 앞산과 마주하여도 좋고, 군불로 달구어진아랫목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얼음장 밑에서 두런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
[좋은수필]송가 / 장타관 송가 / 장타관 빠르다는 KTX가 오늘따라 느렸다. 뒤로 가서 그럴까. 급한 마음에 남은 표를 끊은 게 역방향의 좌석이었다. 친구의 부음을 받고 깜짝 놀라 긴가민가하던 나는 하던 일을 다 밀쳐놓고 오후에 서울행 기차를 탔다. 내게 둘도 없는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러 가는 길이다. 지..
[좋은수필]운현궁, 그 아픈 뜰에 서서 / 김광영 운현궁, 그 아픈 뜰에 서서 / 김광영 늦가을의 인사동 거리는 스산했다. 울먹거리던 하늘은 비바람을 뿌렸고 잎을 털어버린 나목은 젖은 낙엽을 내려다보며 휘청대고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고궁을 향하는 마음은 헐벗은 나무조차 그렇게 아파 보이게 했다. 수많은 골동품 가게를 스치자 ..
[좋은수필]찔레꽃 / 김정례 찔레꽃 / 김정례 나의 찔레꽃은 동지섣달 긴 밤에 피어난다. 십이월에 접어들면 모임마다 송구영신의 아쉬움을 뜻있게 보내려고 저마다 색다른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막상 모임에 가보면 내용은 뻔하다. 총회와 식사를 하고 초청 밴드나 노래 연습장에 가는 것..
[좋은수필]늙은 감나무 / 박혜숙 늙은 감나무 / 박혜숙 초겨울 하늘이 비어 있구나. 그 빈 공간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너는 어쩌면 한 톨 미련도 없이 잎을 다 털어 버렸니. 노인의 손가락처럼 살집 없는 가지에 걸쳐 놓았구나,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올려놓았었던 그 자리에, 꺼칠한 나무껍데기 속엔 내년 봄에 다시..
[좋은수필]종말을 상징하는 빛 / 천경자 종말을 상징하는 빛 / 천경자 누군가 새해를 맞이한 나의 좌우명 같은 것을 말해보라 했지만 감각이 무장아찌처럼 퇴색해 버렸는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안의 희망과 의욕이 고갈되어 버리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현실과 과거와 미래가 함께 내 ..
[좋은수필]이별 연습 / 안재진 이별 연습 / 안재진 길을 나섰다. 별로 갈 곳이 없다. 텅 빈 들녘 길을 따라 떠밀리듯 발길을 옮긴다. 겨울 문턱에 들어선 햇살이 조금 떨어진 산기슭을 더듬는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텅 빈 가지들은 게으른 춤을 춘다. 햇빛 속에 섞여 몸살을 하듯 일렁이는 바람결이 부추긴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