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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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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9월은 / 안재진 9월은 / 안재진 건너편 아파트 지붕 위로 달이 고개를 내민다. 열이레 달빛은 덜 익은 수박 속처럼 붉다 못해 흰 빛으로 흐려 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도 그토록 지루했던 여름을 몰아낸 서슬이듯 제법 서늘한 촉감으로 살갖을 더듬는다. 이대로 앉아 있기에는 이 밤이 너무나 숙연하..
[좋은수필]전봇대는 아프다 / 정성화 전봇대는 아프다 / 정성화 칠십대의 노점상 할머니가 대통령의 가슴에 기대어 울고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매일 자정쯤 시장에 나와 열 두 시간동안 시래기와 무청을 주워 팔아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우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대통령의 표정도 ..
[좋은수필]연리지(連理枝) / 장명희 연리지(連理枝) / 장명희 그 날의 주례는 법정(法頂) 스님이었다. 이십 여 년 전에 농담처럼 했던 약속 때문에 쑥스러운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처음인지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앞으로는 절대로 주례 약속은 하지 않으리라고 멋쩍게 웃으며 하신 주례사는 그러나 아주 ..
[좋은수필]초우(招雨) / 천경자 초우(招雨) /천경자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는 장마 때가 되면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오동꽃이 생각난다. 그리고 한 번씩은 내 뇌리에서 언제까지나 살고 있는 그 두꺼비가 나타나 그때의 일을 회상하게 한다. 웬일인지 일찍부터 나는 곤충이나 동물을 그리는데 흥미가 있었다. 덕분..
[좋은수필]흔적 / 이숙희 흔적 / 이숙희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서서히 청도 정류장으로 들어섰다. 소매 끝에 스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정류장 가장자리에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짙은 황금빛의 은행잎이 팔랑이며 몇 개 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햇살 좋은 마루에 앉거나 엉거주춤하게 선 채 버스를 기다..
[좋은수필]착지(着地) / 정성화 착지(着地) / 정성화 갖다놓은 보리차 한 병이 어느새 다 비워져 있었다. 내가 다가서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남편은 벽을 향해 누운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적요였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그와 나 사이의 거리..
[좋은수필]각도/정성화 각도 / 정성화 각도기의 중심에서 보면 1도라는 각은 아주 작다. 그러나 작은 각일지라도 각도기의 바깥쪽을 향해 계속 뻗어나가게 한다면, 각이 벌려놓는 거리는 점점 커지게 된다. 삶의 각도도 그렇다. 1도만 바뀌어도 십년 이십년이 흐른 후에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서 삶..
[좋은수필]아름다운 소유 / 홍억선 아름다운 소유 / 홍억선 필명이 높으신 어느 노작가의 '무소유'라는 글이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쫓기듯이 허겁지겁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가쁜 숨을 고르게 하고, 더구나 험지에서 지행합일을 실현하는 작가의 청빈함이 알려지면서 더더욱 깊은 감동을 우려내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