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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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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달을 쏘다 / 윤동주 달을 쏘다 / 윤동주 번거롭던 사위(四圍)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나나 보니 밤은 저윽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녘의 침대에 드러 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
[좋은수필]새벽길에서 / 법정 새벽길에서 / 법정 불일암에서 살 때에는 따로 산책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었다. 아무때고 마음 내키면 숲으로 뚫린 길을 따라 나서면 되고, 멀리 펼쳐진 시야를 즐기고 싶으면 뒷산이나 앞산의 봉우리에 오르면 되었다. 혼자서 터덕터덕 숲길을 거닐거나 봉우리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있..
[좋은수필]노출 / 김 훈 노출 / 김 훈 몸을 드러낸 여자들은 도시의 여름을 긴장시킨다. 탱크톱에 핫팬츠로, 강렬하게 몸매를 드러낸 여자가 저 쪽에서 걸어올 때, 더위에 늘어진 거리는 문득 성적 활기를 회복한다.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여자의 옷을 보고 있는지 몸을 보고 있는지 ..
[좋은수필]열쇠 소리 / 염정임 열쇠 소리 / 염정임 주택에서 살 때와는 달리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서 꼭 필요한 물건이 된 게 열쇠와 아파트용 김칫독이었다. 김칫독은 그 해 가을에 사서 몇 년 동안 쓰고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었지만 열쇠는 가끔 잃어버리기도 하고, 휴대를 해야 할 때 하지 않아 일이 생기곤 한다. 이..
[좋은수필]진달래꽃 / 목성균 진달래꽃 / 목성균 우리 집의 진달래 분재(盆栽)가 올해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빈 골방에서 소박데기 순산하듯 혼자 꽃을 열댓 송이나 피웠다. 입춘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겨울 때에 찌든 거실 유리창을 투과(透過)하는 햇살에서 문득 봄을 느끼고 혹시나 싶어서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
[좋은수필]연 / 노신 연 / 노신(魯迅) 북경의 겨울, 땅에는 눈이 쌓이고, 벌거벗은 나무들의 거무스름한 가지들이 맑은 하늘에 치솟아 있고, 아득히 먼 하늘에 연이 하나 떠 있다. 고향에서 연을 날리는 계절은 2월이었다. 핑 하는 소리가 들려 하늘을 쳐다보면 으레 거뭇하게 게를 그린 연이거나 연노랑의 지네..
[좋은수필]겨울 진달래 / 반숙자 겨울 진달래 / 반숙자 「……엄마, 이 가을에 떠나다니요. 모두가 떠나는 아픈 계절에 …….」 막내가 보낸 엽서의 한 구절이다. 입영의 날짜를 받아 놓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고 떠나야 하는 모든 것의 아쉬움에서 낙엽에 띄운 글인 모양이다. 나는 엽서를 받아들고 한동안 멍하..
[좋은수필]편지 / 백 석 편지 / 백석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엣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